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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 세계 내구 챔피언십(World Endurance Championship, 이하 WEC)은 개막 전부터 난관을 겪었다. 당초 3월 카타르에서 개막할 예정이었지만,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 발발하면서 제2전으로 예정됐던 이탈리아 이몰라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됐다. 중동 정세가 조속히 안정되기를 기대하며 카타르전을 최종전인 바레인 경기 직전으로 옮겼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개최가 어려워진 카타르와 바레인을 대신해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이탈리아 몬차가 대체지로 선정되었다.
지난 주말 제7전 바르셀로나 6시간이 열린 바르셀로나-카탈루냐 서킷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서킷으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1년 앞두고 완공되었다. 스페인 스포츠 인프라 현대화의 일환으로 카탈루냐주 몬멜로에 건설된 이 서킷은 F1 스페인 그랑프리를 비롯해 르망 시리즈, 모토GP, 미쉐린 르망컵 등 다양한 국제 대회를 개최해 왔다. 다만 WEC는 이번이 처음이다. 대신 2019-2020 시즌에 프리시즌 테스트인 프롤로그 장소로 사용되어 WEC 팬에게도 익숙한 장소다.
참가팀들은 이전 경기 데이터가 없는 상태에서 경기를 준비해야 했다. 반면 모든 팀이 동일하게 새로운 환경에서 출발하는 만큼, 각 팀의 경쟁력을 상대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시험대가 됐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경우 최근 8월 BMW, 캐딜락과 함께 3일간의 테스트를 실시했다. 또한 데뷔전을 준비하던 지난겨울 마지막 테스트를 진행한 장소 역시 바르셀로나였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수석 엔지니어인 저스틴 테일러(Justin Taylor)는 바르셀로나 레이스를 앞두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바르셀로나 서킷에서는 두 번의 테스트 주행을 했습니다. 실제 레이스 조건과는 달랐지만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고속 우회전 코너 때문에 차량 왼쪽에 상당한 부담을 줍니다. 최적의 평균 랩타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이어 관리와 페이스 유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려운 과제입니다. 이 서킷과 경쟁 팀들을 통해 우리의 현재 위치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이벌 팀들의 경우,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물러나는 알핀 외에도 애스턴마틴이 이번 경기에 차량당 2명씩의 드라이버만 엔트리했다. 한편 일본 후지에서 모처럼 좋은 성적을 냈던 푸조는 드라이버를 교체했다. 포뮬러 E로 돌아간 스토펠 반도른(Stoffel Vandoorne)의 공백을 영국 드라이버 알렉스 퀸(Alex Quinn)에게 맡겼다. 캐딜락 허츠 팀에서는 알렉스 린(Alex Lynn)이 복귀했다. 팀에서는 루이 델라트라즈(Louis Delétraz)와 리키 테일러(Ricky Taylor)를 단발 기용하는 한편 부담이 크지 않은 일부 경기는 차량당 2명만으로 운용해 공백을 메웠다.
바르셀로나-카탈루냐 서킷은 길이 4.657km에 14개의 코너로 이루어져 있다. 긴 직선로와 고속 코너 그리고 느리고 기술적인 구간이 다채롭게 어우러져 있어 코너링 능력과 공력 특성을 복합적으로 시험한다. 코너를 통과하는 리듬이 중요한 서킷인 만큼, 한 번 흐름이 무너지면 랩타임에 큰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이번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비 예보가 있어 타이어 웜업과 그립 확보가 관건이 되었다. 이번에 준비한 하이퍼카용 레인 타이어는 재활용 소재 비율을 대폭 늘리면서 성능을 개선한 신형 컴파운드다. 팀들이 아직 테스트해 보지 못한 타이어이기 때문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바르셀로나-카탈루냐 서킷에서 가장 긴 메인 스트레이트는 1km가 살짝 넘으며, 추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점이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3번 코너는 고속으로 통과하기 때문에 왼쪽 앞 타이어에 큰 부담을 준다. 내리막의 5번 코너는 하중 이동으로 자세가 불안정해지기 쉽고, 언덕을 향해 달리는 9번 코너는 시야가 가려 라인을 잡기 까다롭다. 더구나 두 번째로 긴 직선구간으로 이어지는 만큼 스피드 확보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급제동 후 진입하는 10번 코너 라카이샤(La Caixa)를 통과하면 타이어를 괴롭히는 섹터 3가 시작된다. 타이트한 코너가 연속되기 때문에 밸런스가 무너지기 쉽다. 최종 코너 직전의 저속 시케인이 2023년 제거됨에 따라 메인 스트레이트에서의 속도 확보와 추월 시도가 다소 용이해졌지만 여전히 추월이 어려운 서킷이다.
10월 16일 금요일 오전 11시 30분,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 가운데 첫 번째 연습주행(FP1)이 시작되었다. #83 AF 코르세 페라리의 로버트 쿠비차(Robert Kubica)가 1분 31초 891로 가장 빠른 랩타임을 기록했다. 애스턴마틴과 페라리 세력이 상위권을 나누어 가졌고, 토요타와 캐딜락이 그 뒤를 이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19 차량이 10위, #17 차량은 12위에 있었다. LMGT3에서는 비스타 AF 코르세의 #21, #54 페라리 두 대가 가장 빨랐다.
오후에 이어진 FP2에서도 날씨는 비슷했다. 이번에는 애스턴마틴이 가장 빠른 기록을 세워 오전 쿠비차의 기록을 0.17초 경신했다. 놀랍게도 두 번째는 #17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이었다. 마티스 조베르(Mathys Jaubert)가 스티어링을 잡고 톱타임과 불과 0.038초 차이 나는 좋은 기록을 세웠다. #83 AF 코르세 페라리와 #12 캐딜락까지 상위 4대의 시차는 0.092초에 불과했다. 타이틀 경쟁자인 토요타는 5위와 8위, BMW는 9, 14위에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 열린 FP3에서는 하이퍼카가 코스를 독차지했다. #50 페라리가 톱타임을 기록한 가운데 마튜 자미네(Mathieu Jaminet)가 모는 #19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이 두 번째 빠른 기록을 작성했다. 둘의 시차는 0.015초에 불과했다. 이어 캐딜락과 애스턴마틴이 각각 3위와 4위에 이름을 올렸다. 폴 디 레스타(Paul Di Resta)의 푸조 9X8이 코스를 벗어나 잠시 황기가 발령되었지만 큰 사고 없이 진행되었다.
코스 수리를 위해 예선이 15분가량 지연되었다. 걱정과는 달리 날씨는 맑았다. 예선 첫 세션에서 자미네의 #19 제네시스가 1분 30초 479의 랩타임으로 가장 위에 이름을 올렸다. #8 토요타에 이어 조베르의 #17 제네시스가 세 번째였다. 한편 BMW는 물론 애스턴마틴과 푸조 듀오, 디펜딩 챔피언인 #51 페라리까지 하이퍼폴 진출에 실패했다.
15분 뒤에 시작된 하이퍼폴. 제네시스 듀오와 토요타가 톱타임을 경신하며 때아닌 한일전을 연출했다. 마지막까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치열한 접전 끝에, 폴 포지션의 주인공은 조베르가 모는 #17 제네시스 마그마 GMR-001 하이퍼카였다. 올해 데뷔한 신생팀이 세운 놀라운 성과다. 하이퍼카 클래스 출범 이후 WEC에 새롭게 합류한 팀 가운데 데뷔 시즌 폴 포지션을 차지한 팀은 페라리(2023년) 정도를 제외하면 그 사례를 찾기 어렵다. 데뷔 시즌 일곱 번째 레이스 만에 거둔 성과인 만큼, 팀이 빠르게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번 성과에서 눈여겨볼 점은 조베르가 아직 실버 등급의 드라이버라는 점이다. WEC 하이퍼카 클래스는 대부분 골드와 플래티넘 등급의 검증된 드라이버들이 경쟁하는 무대다. 그런 만큼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이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젊은 드라이버를 기용한 것은 과감한 선택이었다. 현재 하이퍼카 클래스 최연소 드라이버인 조베르는 이번 예선에서 WEC 역사상 최연소 폴 포지션 기록까지 세우며 팀의 기대에 부응했다. 2027시즌부터 골드 등급으로 승격될 예정인 그는 이번 성과를 통해 자신의 잠재력과 경쟁력을 입증했다. 한편, #19의 마튜 자미네는 두 차례 차량이 멈추는 상황에서도 #8 토요타에 이어 3번 그리드를 확보하며 팀의 예선 성과에 힘을 보탰다. 폴 포지션 직후 조베르는 다음과 같이 인터뷰했다.
“팀이 환상적인 일을 해냈어요. 차도 정말 최고였습니다. 트랙은 연습주행 때와는 완전히 달랐어요. 노면 상태가 계속 변했고 접지력도 상당히 낮아 까다로웠지만 타이어 전략을 잘 세우고 모든 것을 잘 조합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10월 18일 일요일 정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경기가 시작되었다. 스타트 직후 다니엘 훈카데야(Daniel Juncadella)가 안드레 로테러(André Lotterer)를 제치고 선두로 나서면서 잠시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이 원투로 나섰다. 하지만 로테러가 모는 #17 차량이 3위로 밀렸고, 훈카데야는 브레이크 실수로 5코너 자갈밭에 빠지며 16위까지 내려앉았다. 알핀과 캐딜락의 접촉, LMGT3 차량들의 다중 사고 등 경기 초반은 버추얼 세이프티카(VSC)가 발령된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혼란을 틈타 선두에 오른 것은 #8 토요타. 뒤이어 #83 페라리가 2위, 로테러가 3위였고 4위에 #50 페라리가 이름을 올렸다. 코스 정리가 길어지면서 세이프티카가 출동했고, 경기 시작 25분이 지나서야 경기가 재개됐다. 선두권이 GT카 트래픽을 만나면서 코스 위는 더욱 혼잡해졌다. 선두를 달리고 있는 세바스티앙 부에미(Sébastien Buemi)에게 스타트 시 규정 위반으로 5초 페널티, 윌 스티븐스(Will Stevens)의 캐딜락 #12에게는 10초 페널티가 내려졌다.
30분이 흘렀을 때 해리 틴크넬(Harry Tincknell)의 #007 애스턴마틴이 5번 코너에서 방호벽을 들이박아 다시 VSC가 발령됐다. #8 토요타가 여전히 선두였고, 대부분의 팀들이 피트인한 가운데 르네 라스트(René Rast)의 #20 BMW만이 코스에 남아 2위까지 순위를 올렸다. #50 페라리와 #7 토요타가 그 뒤를 이었다. 로테러의 #17 경주차는 8위, #19 경주차를 모는 훈카데야는 16위였다.
경기 시작 1시간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레이스가 재개되었다. #20 BMW가 기술적인 문제로 피트로 들어가면서 토요타가 원투로 선두권을 형성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은 훈카데야가 11위까지 올라온 반면 로테러는 13위로 밀려났다. 1시간이 흘렀을 때 로테러가 다시 미끄러지면서 자갈밭에 빠져 14위가 되었다.
1시간 40분이 흐른 상황에서 노면이 어느 정도 말라 웨트 타이어 마모가 심해지자 피트인 타이밍을 두고 눈치 싸움이 격화되었다. 웨트 타이어의 경우 마른 노면에서 달리면 빠르게 과열되고 성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일부러 젖은 노면을 달리기 위해 이리저리 라인을 바꾸는 선수도 있었다. #36 알핀과 #51 페라리를 신호로 타이어 교체가 시작되었다. 올 소프트, 올 웨트 외에도 왼쪽에 미디엄, 오른쪽에 소프트를 쓰는 비대칭 조합 등 팀마다 타이어 전략이 갈렸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도 #19 차량은 올 소프트, #17 차량은 웨트 타이어를 그대로 유지하는 등 팀 내에서도 작전이 갈렸다.
스타트 후 2시간 45분이 지났을 때 남은 차들도 대부분 웨트 타이어를 드라이 타이어로 바꾸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17 차량이 로테러에서 조베르로 드라이버 교체가 이루어졌고, 조금 늦게 피트인한 #19 차에 폴-루 샤탕(Paul-Loup Chatin)이 올라탔다. 아직은 차가운 노면에서 온도를 제대로 올리지 못한 차들은 코스를 벗어나는 모습도 보였다. #19 차량은 왼쪽에 미디엄, 오른쪽에 소프트 조합이었다. 3시간 24분에는 #17 차량이 수리를 위해 피트인하면서 선두권과의 시차는 더욱 벌어졌다.
3시간 35분경, 많은 차들이 코스 아웃하자 정리를 위해 VSC가 발령되었다. 흐린 날씨에 코너 연석에 쌓인 물이 마르지 않아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이 기회를 살려 각 팀이 피트로 몰려들었다. #007 애스턴마틴은 서행 중 멈춘 엔진이 다시 걸리지 않아 결국 리타이어했다. 토요타 듀오는 이 세이프티카 상황으로 3등과 1분 이상 거리를 벌렸던 시차가 5초까지 좁혀졌다.
경기 종료 2시간을 남기고 레이스가 재개되었다. #8 토요타를 선두로 토요타 듀오가 달아났고 #50 페라리, #83 AF 코르세 페라리가 뒤쫓았다. 샤탕이 모는 #19 제네시스 마그마가 9위, 조베르의 #17 차량은 16위에 있었다. LMGT3에서는 #92 만테이 포르쉐가 선두였다.
결국 #8 토요타가 이변 없이 우승을 차지했고 #7 경주차가 2위를 기록하며 토요타가 원투 피니시를 달성했다. 3위인 #50 페라리와는 거의 40초 차이의 완벽한 승리였다. 토요타는 시즌 4승을 거두면서 2026 제조사 챔피언 타이틀을 확정 지었다. 팀으로서는 8번째, ‘토요타 레이싱’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는 첫 타이틀이다. 특히 세바스티앙 부에미는 통산 WEC 100회 출전 경기에서 우승함으로써 특별한 추억을 남겼다. 반면 BMW는 잠시 2위까지 올랐지만 타이어 공기압 위반으로 페널티를 받으면서 3경기 연속 득점에 실패해 드라이버 타이틀 경쟁에서 밀려났다.
사상 첫 폴 포지션으로 기대를 모았던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경기 초반 연이은 코스 이탈로 선두권에서 밀려나 #19 차량이 11위, #17 차량은 16위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전반적인 페이스는 크게 향상됐지만, 젖은 노면에 대한 적응력과 혼란스러운 레이스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능력은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한편 LMGT3 클래스에서는 #92 만테이 포르쉐가 #10 개라지59 맥라렌을 누르고 승리했다. 경쟁 팀들의 강세 속에 고전하던 포르쉐가 2025년 르망 24시간 레이스 이후 오랜만에 WEC 우승을 차지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바르셀로나에서 다음 시즌에 대한 소식을 내놓았다. 2027시즌 드라이버 라인업의 첫 번째 주자로 훈카데야를 확정했다. 2025년 9월 팀에 합류한 훈카데야는 프로젝트 초기부터 차량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WEC는 오는 11월 8일 이탈리아 몬차 서킷에서 시즌 최종전을 치른다. F1 이탈리아 그랑프리 개최지로 잘 알려진 몬차는 단순한 레이아웃과 높은 평균 속도를 자랑해 ‘스피드의 성지’로 불리기도 한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데뷔전 이몰라 완주를 시작으로 스파에서의 첫 포인트 피니시, 르망 24시 완주,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의 폴 포지션 획득까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며 파란만장한 데뷔 시즌을 보냈다. 이제 남은 것은 시즌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레이스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이 시즌 첫해를 어떤 모습으로 마무리할지, 그 여정을 끝까지 지켜보자.
글. 이수진(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